미국만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요즘 들어 미국 히어로물이 조금씩 한글화되고 있다는 소식 또한 접했을 것이다. 슈퍼맨과 배트맨, 스파이더맨과 아이언 맨, X맨 등등, 이름 뒤에~맨만 붙이면 히어로가 된다는 어릴 적의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원인이었던 미국 히어로물은 과거 형님들의 상상에서부터 현재 영화관에 타이틀을 내걸며 관객들을 끌어모으는 지금까지 진행형이다. 그러나 그 역사에 비해 미국 슈퍼히어로 문화에 대한 인지도는 생각보다 많이 얕다. 사람들은 수퍼맨이 엄청 세다는 건 알지만 수퍼맨이 지금까지 어떤 적과 싸워왔으며 수치적으로 얼마나 강한지는 알지 못한다. 수퍼맨이그저 과거의 향수인 줄 아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영화나 과거 드라마가 원작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요새 진행되는 미국만화 한글화 작업은 히어로물에 심취한 사람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이고, 미국만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몰랐던 것들에 대해 흥미를 가져다주게 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헐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엄청난 근육질의 사나이에게 흔히 이런 별명이 붙곤 하는데, 그 원인에는 한 전설적인 레슬러의 영향도 있겠으나 여기서 말하려는 뜻은 슈퍼맨과 배트맨 다음으로 유명한, 아무리 몸이 커져도 절대 안 찢어지는 초 극강미세 스판덱스 팬츠를 입고 다닌다는 그 헐크 되시겠다. 영화화야 몇편이 만들어졌지만 흥행만을 놓고 보면 인지도가 그리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이상하게도 슈퍼맨 배트맨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아는 히어로이고 그만큼 인기가 있다. 이 이유에는 우리가 접하지 못했던 미국 히어로물의 수십년의 역사와 가상세계 내의 여러 가지 이슈, 그리고 그것을 헤쳐나가는 히어로의 성장에 있다. 마침 시공사에서 출시된 [플래닛헐크 PLANET HULK]와 [월드 워 헐크 World War Hulk]가 미국 히어로물의 매력을 맛보여주는 기회가 되었으니, 필자는 이 녹색 괴물이 얼마나 멋진 놈인지에 대해서 잠시 설명해보려고 한다.
긴 글이 될 것 같아 본문을 아래에 접어놓으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책을 구입할 생각을 가진 분들은 먼저 원작의 감동부터 느껴보시고 오길 권한다. 우선 헐크에 대한 간단한 설명부터 보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시라.
플래닛 헐크는 당시 마블의 대형 이벤트 중 하나였던 시빌 워 (미국 히어로물의 양대산맥 DC와 마블은 종종 그들의 세계관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이벤트를 발행함으로써 히어로들간의 크로스오버를 그린다. 이 이벤트를 통해서 각 히어로들의 이슈-미국 히어로만화는 20페이지 내외의 잡지 형태로 주간, 혹은 월간마다 발매되고 있는데 이를 이슈라고 부른다-에도 공통된 설정이 공유된다)와 동일한 시간대에 발행되었다. 초인등록법안을 놓고 편을 갈라 싸우려는 히어로들은 감정에 이끌려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헐크가 위험하다고 판단, 그를 먼 외계로 추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물론 이 때 그들은 헐크를 죽이거나 유배시키려는 목적이 아닌, 단지 그를 이 싸움이 끝날 동안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조용한 행성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 의해, 헐크는 외계 생명체들이 왕국을 구성하고 서로 끈질기게 싸우고 지배하며 약탈하는 행성 '사카아르'에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헐크는 행성의 최고 지배종족 임페리얼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나간 뒤, 그 행성을 지배하는 황제 '레드 킹'의 콜로세움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헐크, 싸운다! 원천적으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녹색 괴물은 보이는 모든 것을 때려눕히고, 자신을 지배하려는 황제를 때려눕히겠다며 달려들지만 고대의 힘을 가진 보좌관과 황금 로봇갑옷을 입은 레드킹에게 저지당하고 지옥의 훈련장으로 보내진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장에서 헐크는 7명의 생존자 중 한명으로써 그들과 협력하여 콜로세움에서 모든 적들을 무찌른다. 동료들은 서로의 생존을 위한 임시적 협력에서 함께 한다는 것의 결속을 느끼며, 형제의 결의라는 '워바운드'를 맺고 서로를 마음으로 함께 하기 시작한다. 검투사들의 마지막 결투에서 헐크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실버서퍼를 상대하게 된다. 헐크와 같이 노예의 복종디스크를 찬 실버서퍼는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제한당했지만, 그 능력만으로도 워바운드를 압도적으로 때려눕혀 헐크를 고전하게 만들지만, 헐크는 동료와 함께 실버서퍼의 빈틈을 노려 그의 복종디스크를 부수고, 그로써 힘을 되찾은 실버서퍼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 주변에 있던 모든 노예들의 디스크를 부숴준다. 그리고 한때 노예였던 자들과 황제 레드킹의 폭정에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헐크와 워바운드는 황제의 폭정이 통하지 않는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사카아르에는 전설이 내려져온다. 세상을 구원할 사카아르 선, 그리고 세상을 파괴할 월드 브레이커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헐크, 전설따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콜로세움의 일로 이미 '그린 스카'를 자신들을 레드 킹의 폭정에서 구할 사카아르 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헐크는 원하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며 사람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헐크를 추종하는 자들이 반란군이 되고, 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지만 헐크는 단지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않는 조용한 삶을 살고 싶을 뿐, 이들의 전쟁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을 버린 빌어먹을 인간들과 같은 족속이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며, 이 빌어먹을 전쟁을 끝내기 위해선 '때려눕혀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황제의 보좌관과 싸우는 중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스파이크 무리. 생명체의 신체에 기생하여 에너지를 빨아먹는 이 기생생물의 앞에서 황제의 군대와 반란군 모두가 위험에 처하지만, 헐크는 여전히 헐크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는 황제 '레드 킹'의 잔인한 유흥에 헐크는 최고로 열받은 상태이다. 레드 킹의 앞에서 그는 사카아르의 파멸을 막고, 분노한 헐크답게 이 꼴보기 싫은 황제놈의 면상을 날려버린다.
새 시대가 찾아온다. 그린 스카는 '그린 킹'으로 불리며 새 왕위를 잇지만, 단순한 헐크의 방식에 두려움을 표하는 자들도 많다. 레드 킹이 세상을 힘으로 지배했던 것처럼 헐크 또한 힘으로 그를 무찔렀으니, 그 또한 언젠가 레드 킹의 폭정을 흉내내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헐크, 영리하지 못하나 솔직하고 현명하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필요한 세상을 느끼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을 기꺼이 나선다. 그가 자신의 주체못할 힘을 처음으로 뜻있는 일에 쓰는 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때에, 헐크는 자신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세계의 진정한 히어로이자 구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헐크가 타고 온 우주선이 폭발하여 온 세상을 휩쓴다.
행성 사카아르의 온 세상이 불에 휩싸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헐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헐크, 그리고 다른 헐크들.
이상이 플래닛 헐크의 전체적인 줄거리인데, 스토리상으로 보자면 영락없는 영웅담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련을 극복하며 성장하며 결국 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며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여 결국 전설이 되는, 고전적이라면 충분히 여러 신화에서 느껴온 그대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무식한 헐크의 고생길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은 지나친 폄하이다. 이 작품에서 헐크는 무식하지도 않고, 기분내키는대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이성을 잃은 괴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작품에서 헐크는 이전 작품들과 별개되는 특별한 '사카아르선'의 자아를 가진다. 또한, 플래닛 헐크를 특별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헐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헐크의 원래 자아가 핵과학자 브루스 배너인 것도 알 것이다. 보통의 이슈에서 헐크는 브루스 배너의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함으로 표현되는데, 이 이슈는 헐크가 주인공인 만큼 그 상황이 역전된다. 말하자면 브루스 배너가 헐크의 억압받는 내면인 것이다. 이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슈가 (GIANT-SIZE HULK #1)이다. 두 자아는 꿈 속에서 몸의 주도권을 빼앗는 싸움을 펼친다. 물론 꿈 속의 공간은 헐크의 무시무시한 힘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통하는 것은 이성을 억제할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고, 이 점에서 헐크는 브루스 배너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 하지만 헐크는 몸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고 헐크의 몸으로 여전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헐크가 헐크의 이성으로써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헐크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헐크는 모든 것에 분노하고 파괴하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으로 명예를 지키고 생명을 구하는 자가 된다. 후반부에 브루스 배너가 다시 등장하는 부분은 보좌관 올드스트롱과의 결혼 서약식에서이다. 헐크는 겉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지만, 자신의 무지막지한 힘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피한다. 그러나 그 힘을 받아줄 수 있는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가장 유약한 부분이자 헐크 자신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아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헐크의 자아는 아니나 브루스 배너의 반대편에서 헐크를 자극하는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생사를 함께 한 워바운드 미에크이다. 사실 헐크가 매력있는 인물이지만 필자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미에크를 떠올릴 정도로, 이 작고 힘없는 곤충은 스토리 내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담당한다. 그 또한 헐크와 같이 핍박받는 떠돌이에서 시작하여 헐크와 같이 죽음의 고난을 겪었고, 임페리얼 귀족들에게 가축으로써 고통받는 동료들을 구하며 그 존재들 사이에서 구원자로 떠받들어지고 그들을 이끌게 되며, 결국 왕으로 변태하며 힘없는 이들의 대변자가 된다. (생각해보면 그는 둥지의 마지막 왕족이다!) 그는 먼저 태어난 왕으로써의 책임감을 가지지만, 처한 현실을을 바꾸기에는 힘이 부족하기에 헐크를 부추기게 된다. 미에크는 헐크의 본 모습이 분노와 파괴와 복수라고 말한다. 이는 헐크의 본 모습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며, 브루스 배너의 자아를 가진 헐크가 두려워하는, 헐크의 파괴의 본 모습을 부추기는 또 다른 그린 스카의 자아이다.
물론 미에크의 모습이 일부 독자들에게는 불쾌하게 보일 것이다, 작가는 그의 행동을 바위인간 코르크로 하여금 설명시킨다.
코르크 : 나는 바위야. 너희 모두가 죽고 땅에 묻힌 뒤에도 나는 여기 남아 있겠지. 그러니 여기 관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헐크 : 하지만?
코르크 : 저 둥지인(미에크와 곤충인간들)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우린 이미 패배했다는 두려움이 밀려와.
저들에겐 미움만이 남았어, 녹색 가죽. 네가 저들에게 희망을 되돌려줘. (#100 중에서)
헐크, 전설 믿지 않아.
플래닛 헐크를 관통하는 중심 내용이 영웅담이라면, 그 영웅담의 '사카아르 선' 신화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할 것이다. 사카아르에는 세상을 구할 사카아르선과 세상을 파괴할 월드 브레이커의 전설이 내려져오고 있었다. 헐크가 등장하자 이 전설은 헐크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고, 헐크의 경이로운 전투능력은 사람들의 가설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실버서퍼가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킨 날, 헐크와 실버서퍼는 세상을 구원할 기적의 가능성을 열었다. 불모지가 된 땅에 그의 피가 흘러 덩굴이 자라났으며, 엄청난 힘으로 뒤틀려 어긋난 지각판을 끼워맞추고, 폭정을 일삼는 황제를 처치하고 신세계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의문을 가진다. 헐크가 세상을 구할 사카아르 선일까? 아니면 월드 브레이커일까?
실제로 그는 이 전설을 시험하기 위해 섀도 사제의 제단에 서게 된다. 그러나 시험의 방에서 그는 너무나도 쉽게 분노하고 만다. 헐크는 이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다만 여전히 때려부숴야 할 놈이 있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쟁을 처리한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폭정에서 자신들을 구한 헐크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여기서의 헐크는 현명하다. 새로운 세상을 재건하기 위해 그만이 할 수 있는 경외로운 방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난폭하고, 자신의 주체 못하는 힘을 두려워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우주선의 폭탄이 터졌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체못할 분노는 원래 그의 모습이었다.
내용의 결과를 보자면, 헐크는 원하든 원치 않았든 결국 사람들을 구원하고 자신의 힘을 뜻있는 곳에 쓰게 된다. 그러나 구원자의 평가 이전에, 헐크 개인의 의견을 물어 그가 정말 선택받은 구원자의 행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추앙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도 필요하다. 헐크가 모든 이에게 평등하고 현명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것은 헐크 자신의 자비심에서 나온 거라기보다는 추악한 인간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기 싫어서가 아닐까 한다. 또한 반란에 있어 그가 전쟁에 참여했던 것은 미에크를 비롯한 시민들의 소망이 구현된 것일수도 있다. 레드 킹의 폭정에 치를 떨었던 사람들이 그 분노를 모으기 위한 아이콘으로 헐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헐크는 또 다시 분노의 화신이 되어 사람들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이 된다.
실제로 구원자에 대한 전설이 믿을 만한 것인가?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더 나은 것을 소망하곤 한다. 그 상황에서 영웅의 등장은, 그들이 자신의 소망을 투사할 수 있는 인물이 나왔다는 것에 환호하게 된다. 실제로 헐크는 그들이 바라던 거의 모든 일을 경이롭게 해내었다. 하지만 위대한 영웅은 태초부터 위대하지 않고, 전설은 그가 고난을 헤쳐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로써 구원은 기적이 되고, 사람들은 바라는 것을 얻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헐크가 바랬던 것은, 복수라는 이름은 정말 자비로운 구원자가 가질 수 있는 정당한 감정일까? 아니면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고 그래서 분노한다는 것을 너무도 애처롭게 보여주는 것일까? 그가 구원자인지, 아니면 파괴자인지에 대한 평가는 그 뒤로 이어지는 이슈 [월드 워 헐크]를 위해 남겨둔다. 빠른 시간 내에 이 작품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PS: 플래닛 헐크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블의 외전격 스토리를 다루는 What if.. 의 플래닛 헐크 편을 추천한다. 다만 본편처럼 정발본이 나온 것도 아니기에 찾는데는 외국 사이트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헐크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은 이 또한 만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