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 월드 워 헐크
월드 워 헐크는 전작 플래닛 헐크의 뒷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행성 사카아르에서 고난을 거치며 왕, 그리고 구원자로 떠오른 헐크. 그러나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복수심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지구인들을 향해 복수의 칼을 겨눈다. 이 복수가 월드 워 헐크 내용의 전부이다. 그만큼 내용은 전작에 비해 단순하고 호쾌하다. 그야말로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때려부순다고 해도 좋을 만큼 시원시원하다.
전작의 주된 이야기가 글래디에이터 등을 닮았다고 하면, 여기서의 헐크는 침략자(물론 그것의 목적이 복수겠지만)로써 어쩌면 외계인의 지구침공과 비슷한 스토리로 읽힐 지 모른다. 하나 다른 점은 복수로 눈이 뒤집힌 헐크일지라도 그는 여전히 히어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쉽사리 헐크를 단지 악당 혹은 파괴자로써만 볼 수 없게 되는 점이며, 관점에 따라서는 일부 책임감 없는 히어로들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액션이 시원한 만큼 생각할 것 없이 액션을 즐기는 것도 월드 워 헐크의 매력이지만, 본작의 매력을 그저 전작보다 못한 (그림체는 확실히 인정한다) 생각없는 액션물이라고 평가되는 것이 팬으로써 기분이 좋지 못하다. 월드 워 헐크도 그 나름의 진지한 세계관과 생각해봐야 할 구석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를 중점으로 월드 워 헐크를 다시 평가해보고자 한다.
※ 여전히 아래는 스포일러가 함유되어있습니다.
일루미나티, 그리고 시빌 워
앞서 말했다시피 플래닛 & 월드 워 헐크의 원인은 헐크를 지구 밖으로 보낸 히어로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히어로들의 비밀단체인 일루미나티가 그 주범인데, 이들은 각 분야의 대표자인 만큼 헐크에게 있어서 쉽지 않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또한 그 때의 상황에 시빌 워 스토리라인이 진행중이었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할 것 같다. 초인등록법에 따라 히어로들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두 팀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었으며, 이는 항상 정의라는 이름 아래 협력하던 히어로물에 있어 신선한 소재였다. 힘의 가치를 비교하여 누가 더 강한가를 따지는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결투의 본능이고, 이 당시의 배경을 월드 워 헐크도 그대로 받아들인 듯 헐크와 지구 히어로들과의 전쟁, 나아가 간이 콜로세움에서의 히어로들의 결투도 포함되어있다.
시빌 워의 중요한 주제는 히어로들에 대한 새로운 가치판단과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어떤 것이냐에 있다. 이 점은 월드 워 헐크에서도 이어지고, 독자들은 헐크 VS 히어로의 싸움에서 과연 히어로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들의 행동이 어디까지 용서가 되며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염두해 둘 것은, 히어로들의 정의가 항상 인간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때로는 그들 자신, 소수의 히어로들만을 위한 이익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헐크 또한 그의 분노와 복수가 정당한 것인지, 광신도로 변해버린 인간들을 통해 그 또한 진정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중의 인기를 현혹시킬 뿐인지도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Red & Green King
플래닛 헐크의 초반부 콜로세움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면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플래닛 헐크의 콜로세움 장면은 레드 킹의 폭정과 유희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리고 전작에서 검투사 노예였던 헐크는 직접 검투장에 히어로들을 풀어놓고 자신과 동일한 행동을 시킨다. 물론 헐크는 복수를 위해 이런 행동을 선택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만, 레드 킹을 쓰러트리고 평화를 재건하려 했던 '그린 킹'의 행동은 그 자신이 폭정을 재현함으로써 다시금 폭력과 유희를 드러낸다.
이 헐크의 행동을 가장 적나라하게 대변하는 것은 바로 미에크이다. 여러 모로 플래닛 & 월드 워 헐크에서 그들의 솔직한 속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둥지인 미에크의 말과 행동인데, 전작에서도 그는 헐크의 본성이 분노와 복수라며 그를 부추긴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강도가 더욱 심하다. 심지어 그는 파괴만이 구원이라고 말하는 종말론자의 성격까지 띄며 헐크를 부추긴다. 여기서, 미에크가 원하는 것이 정말 둥지의 구원이었을지 아니면 단지 복수심이었을지 생각해본다. 그 원인이 핍박받던 둥지인의 마지막 왕이자, 다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져버린 떠돌이의 절망이라고 할 지라도, 그가 바라는 것은 레드 킹보다 심하면 심했지 더 나을 것이 없는 파괴와 분노의 길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파괴의 길을 주도하는 레드 킹의 역할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그가 헐크를 두고 모든 종말을 '확실하게 끝을 낼 수 있는' 자라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과거를 똑같이 겪게 하는 것일지, 아니면 권력을 가지고 싶은지는 확실치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실 엘로임 카이피가 더 적당할 것이다.)
구원자, 혹은 파괴자
전작에서 사카아르 행성에 전해지는 전설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전설에 존재하는 구원자 사카아르선과 파괴자 월드 브레이커, 그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선택된 것이 헐크. 하지만 전작에서 헐크가 세상을 구하고 이 작품에서 헐크가 지구를 파괴하려 한다고 단순히 플래닛이 구원자, 월드 워가 파괴자의 시점에서 스토리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헐크는 모든 히어로들 중에서도 가장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다. 우주에서 가장 강한 괴물 헐크의 강인한 육체와 분노 뒤에는 허약하지만 천재적인 핵과학자 브루스 베너가 있다. 이 양면성이 절대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사카아르 선과 월드 브레이커도 한 쪽을 떼놓고 분류하기엔 곤란한 존재이다.
하지만 월드 워 헐크에서는 헐크의 의지가 너무 강한 탓에 브루스 베너의 의식은 나오지 않는다. (종종 헐크가 인간형태로 변하긴 하지만, 브루스 베너의 의식이 돌아왔다기보다는 헐크가 적을 속이기 위해 모습을 바꾸었다거나, 그린 스카의 비 분노화 의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브루스 베너를 대표하는 의식은 월드 워 헐크에선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파괴자 월드 브레이커의 역할을 하는 '그린 스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태양의 힘을 가진 센트리이다. 그 또한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히어로이지만 본래의 성격은 정신병적이라고 할 정도의 정신분열증과 대인기피증을 지니고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사람을 따르기가 겁나는 대인기피증,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들의 격돌은 그만큼 불안정함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확실하지 못하여 파괴자가 되고, 구원자가 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가 다음과 같다.
저들은 자기들 멋대로 널 불러 대지.
구원자, 파괴자.
하지만 중요한 건, 네가 어느 쪽을 택하느냐야.
이는 가장 빠른 히어로도 피하지 못한 수십년의 난제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슈퍼맨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강력한 힘으로 빌런을 쓰러트리는 히어로들은, 그 싸움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재산손실과 인명피해에서 자유롭지 않다. 히어로들은 얼핏 보면 악당들의 위기에서 사람들을 구해주는 것 같지만, 그만큼 히어로들 자신의 실수에서 위기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아이언 맨 토니 스타크는 전쟁국가에 병기를 나눠주는 일로 돈을 벌고, 미스터 판타스틱 리드 리차드는 여러 에피소드에서 자신의 실수로 차원의 존재를 여럿 불러내었으며, 가장 가까운 시빌 워만 해도 잘못된 발명으로 골리앗이라는 히어로를 죽인 예가 있다. (오죽하면 리차드는 마블 세계관에서 가장 악랄한 빌런-악당 이라고 말하기도 하니..)
이 히어로의 양면성을 고발하는 가장 적절한 장면이 콜로세움의 증언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히어로들의 잘못된 행동에 잃은 것들을 증언함으로써 히어로의 문제를 고발한다. 스파이더맨의 명언이 작품 내에도 나오듯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아쉬운 것은 헐크의 복수가 폭발 그 자체에 맞춰져있고, 이들은 자신의 실수 혹은 잘못에 대해 '폭탄은 우리가 설치한게 아니'라는 대답으로 사건을 얼버무린다. 그것은 미에크의 말로 흐지부지 되고, 모든 것이 명확히 해결되지 않은 채 센트리와 싸우느라 모든 힘을 소비해버린 헐크만이 헬리콥터에 실려 어딘가로 우송되고, 그 날의 사건은 단지 헐크의 분노로만 무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 전에 '시빌 워'가 히어로들의 양면성에 대해 좀 더 솔직한, 그리고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었고, 월드 워 헐크의 마지막 장면 또한 우리를 자극시키며 앞으로 어떤 전개가 일어날 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고하시라.